보통 블로그에 글을 남길 때는 좀 여유롭게 시간을 두고 쓰는데, 내일(아니 이제 오늘이군)은 8시 전에 일어나야 함에도 불구하고 꾸역꾸역 짧게 남겨본다.


또 다시 가을이 왔다.

올 여름은 내내 너무 더워서 - 아일랜드로 일주일간 피신을 갔다오긴 했지만 - 빨리 가을이 오면 하고 바랐는데, 미처 가을 옷을 준비할 시간도 없이 성큼 찾아와버리니 지나간 여름이 살짝 그립기도 하다. 가을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기도 하면서 또 가장 두려운 계절이기도 하다. 가을은 가뭄에 단비같은 추석 연휴가 있어 여유가 있고, 막 덥지도 춥지도 않은 딱 좋은 날 부근의 생일도 있고, 연말 약속이 하나 둘씩 생기며, 야외 카페 테라스에 앉아있어도 춥지 않은, 따뜻한 커피를 마실지 아니면 차가운 커피를 마실지 고민되는 그런 계절이다. 여름의 싱그러운 잎사귀는 하나 둘 단풍빛으로 물들며, 해가 질 때면 지평선에 걸쳐있는 해와 유난히 붉은 노을, 그리고 여름 꽃처럼 너무 화려하지도 겨울 꽃처럼 너무 차분하지도 않은 가을 꽃들은 정말 사랑스럽다.


나는 가을에 태어나서 그런지 가을만 오면 싱숭생숭한 감정이 가끔 찾아 온다. 흔히들 '가을 탄다'고 하나?


25 - 백수

작년 가을은 특히 글, 일기, 사진 등 기록한 것이 거의 없는데 그래서인지 하루하루 어떤 생각을 했었는지 어떤 감정이었는지 기억이 흐릿하다. 그냥 하루를 억지로 '살아내는' 것에 의의를 두었던 것 같다. 사실 작년만의 일이 아니라 최근 몇 년간 묵혀둔 문제가 더이상 견디지 못하고 터져버렸다. 나의 정체성과 가치관, 가치 판단의 우선순위와 선택에 대한 문제도 있었고, 가족 내에서의 위치, 친구들 사이의 관계, 그 외 인간관계 등등. 하고 싶은 일이 있었지만 - 아니 진짜로 하고 싶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 내가 바라는 대로 안되었고, 도전에 대한 조바심도 나서 자신감도 떨어지고, 아마 살아오면서 가장 나를 하찮게 생각했고 자존감이 낮았을 때 였을 거다. 그냥 무슨 말만 들으면, 툭하면 눈물이 났다. 별 것 아닌 말이나 행동에도 쉽게 상처받고 자책했지만 본능적인 방어 기제로 본의 아니게 가까운 사람들에게 말로서 또 행동으로서 상처도 많이 주었던 것 같다. 뭐 또 하나의 흑역사랄까.


24 - 복학생

그 전 가을은 복학하고 나서 실질적인 마지막 학기였는데, 더 가관이었지. (아마) 마지막 학기랍시고 등록해 놓고 덜컥 다음 봄 교환학생을 가겠다하지 않나. 즉흥적으로 국내 여행도 서너번 갔었고. 뭔가 즉흥적인 일들이 많았다. 근데 이 모든 즉흥적인 일들이 절대 후회되지는 않는다. 교환학생에 지원한 것도 그렇고, 여행도 그렇고, 그 외 등등. 보통의 신중하고 안정적인 선택을 추구하는 나라면 평생 절대 하지 못했을 일들이니까.


23 - 휴학생

그 이전의 가을은 휴학 4개월 차였는데, 이 때는 혼자 보낸 시간이 가장 많았던 시기임과 동시에 나 자신에 대해서 가장 많이 알게 되었던 시기이며 친구들을 거의 만나지 않았던 시기다. 욕심 많은 게으름뱅이의 시기?


22 - 복학생

첫 휴학 후 다시 돌아온 학교 그리고 개별연구. 중심을 못잡고 이리저리 끌려다녔던 바보같았던 가을.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좀 더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21

처음으로 맥주 한캔 마시고 밤중에 강에 뛰어들까 생각함. 두마리, 세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다가 결국에는 한마리도 잡지 못했던 가을.


26

매 가을, 만으로 나이를 한 살 더 먹으며 그만큼 한 단계 더 성숙해지라고 당장 해결하기에 버거운 문제들이 내게 닥치는게 아닐까?

'가을'이라는 계절 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계절이니까 이번 가을은 조금 더 행복하게 보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Posted by 곰지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