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하는 소녀의 책장



이사를 준비하며 정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세월아네월아 정리하는 중.



책장을 찬찬히 보다가 갑자기 글과 사진을 남겨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최근 10년간 나의 행적을 가장 적나라하게 들추는 곳이 바로 여기 이 책장 앞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를 쓴 일기장도, 블로그도 아닌 바로 여기 이 곳.


물론 그 동안 잦은 이사로 몇몇 자료들은 없어지기도 하고, 꼴도 보기 싫은 것들은 버리기도 했지만 나의 발자취를 이 책장 앞에서만큼은 숨길 수 없었다.



눈에 밟혀 떠오른 기억들을 정리하자면,

대한민국 학생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수학의 정석 - 실력정석의 연습문제는 풀기 싫어서 답지를 베껴내고는 했던 기억

중학교 때 밤을 새워가며 읽었던 해리포터 시리즈

과학 공부를 시작하며 수도없이 봤던 하이탑 시리즈

중3에 맥머리 유기화학 6판을 처음 접했는데 아직도 마스터하지 못해 보고있는(지금은 8판) 애증의 화학

그 옆의 이제 화석이 된 5판 옥스토비와 멘붕을 안겨줬던 시스카 일반화학

기린책 사자책 목련책 박쥐책으로 불렸던 각종 생물 관련 서적들

나를 항상 힘들게 했던 미적분학

서양 미술사 연구회 활동에 이은 modern arts, art history and visual culture 교양수업 강의자료들,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

이제는 그만 보고싶은 토플, 텝스 ㅠㅠ 지긋지긋했던 해커스. 하지만 앞으로 몇번은 더 봐야하지 않을까...

JAVA랑 C도 공부했었구나

최태성쌤 강의 들으면서 울컥했던 한국사 시험 준비

매 학기가 끝날때마다 강의 자료 PPT 인쇄물과 필기를 정리한 20여개 제본과 바인더

매주 밤새서 손으로 썼던 실험 레포트들과 각종 시험 준비했던 흔적들, 미트디트피트리트? 휴학의 방황기

프린트한 자기소개서와 이력서, 보고서 뭉치들

좋아하는 무라카미 하루키와 더글라스 케네디, 알랭 드 보통의 작품들

마지막으로 정말 보물같은, 가족들의 눈을 피해 책 사이사이에 숨겨놓은 일기장과 그 곳에 있었는지조차 잠시 잊었던 편지들.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순간들과 잊고싶은 순간들 모두가 일기나 블로그에는 문자의 형태로 쓰여져 기억된다면 - 그 마저도 부족한 표현력으로 담아내지 못한 상황들과 나의 감정 - 책장 앞에서는 그 때 그 순간의 나를 또렷이 기억할 수 있었다.

그래서 가끔은 긴 글보다는 한 장의 사진과 짧은 글귀, 구구절절 긴 편지보다는 짧은 카드가 더 와 닿는지도 모르겠다.


'급할 수록 돌아가라.'라는 말이 있듯이 먹고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가까운 것들만을 바라보기 보다는

여유를 가지고 좀 더 멀리 내다볼 수 있는 현명한 사람이 되기를 :-)



지금 당신의 책장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나요?

Posted by 곰지하